달아나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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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는 그림자



지붕이 라면 끓는 소리를 돌려 꺼요
서둘러 나온 햇살이 소곤거림 쪽으로 옮겨가요

낮은 림보를 거뜬히 통과하는 어설픈 그림자들, 검은 바닥이 쭉쭉 늘어나요

안쪽 손잡이를 딸깍 누르는 그 손에
열쇠가 있어요
외부의 소문은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한 문들
발끝 세운 궁금증이 서성여요
돌아간 체념이 오래된 뒤꿈치를 찾아 끼워요

숲이 생긴 비밀에서 뛰어노는
낯선 짐승이 불쑥불쑥 벽을 들이받는 가계도,
그들만의 유전자로 뭉쳐진 길들이 마구 달아나요
대대로 전해오는 법전엔 콧수염 돋은 문장들이 있어요
매캐한 단락을 속독한 손이 서둘러 창을 열어요

늦은 밤을 돌다 온 발그스레한 뺨에게 물어요
허풍을 떨고 싶니, 바람 가득한 바지를 입고 싶니

품이 헐렁해지면서
딱 맞는 몸을 찾아 조금씩 달아나는 그림자들
목소리를 갈아 끼운 겸손이 부드러운 털을 세워요

키가 줄어 걱정이라는 말에는 더 이상 여드름이 돋지 않아요


- 최연수, 시 '달아나는 그림자'


대대로 전해오는 사춘기의 법전엔, 콧수염에 여드름 돋은 문장과 허풍과 뿔이 들어있습니다.
안이 궁금해 문 잠근 밖에서 발꿈치를 들고 서성이던 시간.
이제 그 법전도 저만치 물렸습니다.
어느새 청년으로 자란 자녀는 겸손해지고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학생들이 귀가하는 시간, 그들의 유연성과 재잘거림이 부러워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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