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에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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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봉 석종현 논단

 

옥중에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역사속의 기억들, 같은 행위의 이중 잣대

 

 

옥중에서 <</span>동양평화론>(미완성)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18791910)109년 전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그러나 10.26안중근 의거일로 기억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도리어 대다수 한국인은 10.26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들의 주검에 대하여 한국 국민들의 인식은 어떤 것일까? 아니 안중근의사의 의로운 죽임이 저격 당한 것보다 홀대받아온 이유는 뭘까. 안중근의사는 가해자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피해자여서일까? 이같은 추론은 정확한 분석이 될 수 없다.

 

 

일본군의 칼날과 작두로 목이 잘린 채 잔혹하게 죽어간 수많은 한말 의병들, 공작정치에 의한 수많은 민주투사의 실종과 죽음을 두고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스스로 역사의 청맹과니임을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여전히 일반 국민 속의 안중근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정치적 흐름 속의 안중근으로 축소된 채 박제화 됐다는 것, 이 나라의 여론을 장악한 기득권 세력의 가슴에 안중근보다 박정희가 더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 등에서 보다 정확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 하면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로만 집중적으로 부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일종의 고독한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그래서 일본의 일부 극우파들까지 존경을 표시해온 반면에 국내의 일반 국민이 정을 붙이기에는 다소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측면도 있다.

 

 

그나마 일부 시민들이 차량 뒤에 붙이고 다닌 안 의사의 표식(약지가 잘린 손바닥 도장과 대한국인이란 글씨)도 국수주의적 기호(記號)로 해독된 측면이 강하다.그러나 제대로 알고 보면, 안중근 의사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저격은 벼랑 끝에 몰린 당시 대한제국의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독립투사인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상징적 수단에 불과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정세를 잘못 판단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이토의 진심을 오해하여 실수로 한 짓이라고 말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회유를 받았으나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 대신에 자신은 독립 의병군 중장으로서 10만의 의병을 죽인 적장을 전투에서 사살한 것일 뿐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하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일제 법원이 사형 선고를 내리자 곧바로 항소를 포기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한 행동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진면목은 도리어 평화의 사도라는 측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도 곧바로 항소를 포기했다는 사실, 의병군 중장을 자임하며 히로부미를 사사로운 감정에서 죽인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는 사실, 옥중에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동양평화론>(미완성)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안 의사가 법정투쟁<<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동양평화론>을 통해 밝힌 주장과 정신은 1919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정신으로 이어졌다.사실 우리 사회는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다 보니 제대로 대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를 숭모하기보다 모욕하고 있는 우리의 벌거벗은 자화상은 수없이 많다.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으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청년'의 형상으로 묘사된 안 의사 동상이다.그런데 그 동상을 제작한 김경승(19151992)은 친일파(정확한 표현은 민족반역자) 경력을 가진 대표적인 조각가로 손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중근 장군 탄신 100주년이던 197992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휘호를 내리고 기념관을 이충무공의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聖域)으로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 민족정기의 화신(化身)으로 추앙받아 마땅한 안중근 장군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동격의 위인으로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해 1026일 시해됨으로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부친의 서거 5개월만인 1980326일 안중근 기념관을 찾은 것은 바로 안중근 장군을 숭모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과 계획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인(故人)을 대신해서 그곳을 찾았음에 틀림없다.박정희 대통령처럼 안중근 장군을 존경하고 숭모했던 정치지도자는 대한민국에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안중근 장군을 모독하는 것이라느니, 심지어는 안중근 장군이 이토를 처단한 날에 박 대통령이 시해됐다며 두 분을 상극의 인물로 선전ㆍ선동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109주년, 박 전 대통령의 ‘10.26’ 40주년. 7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총격사건으로 역사의 한 장을 기록했다. 한 사람은 국적(國賊)을 처단했고, 한 사람은 심복의 총에 숨을 거뒀다. 한 사람은 영웅이 됐고, 한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역사는 그 누구의 편도, 그 어떤 시대의 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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