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그 365일 첫 날의 포효

페이지 정보

본문

천봉 석종현논단

 

2021년 그 365일 첫 날의 포효

 

2021년 새해 첫날,

즉 원단(元旦)의 날에 현 정치권의 권력을 탓해야 할 듯 싶다.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지, 파시즘의 전체주의가 아니다.

 

 

한해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를 한자로 제일(除日), 또는 세모(歲暮)라고 한다. 소세(小歲)라는 용어도 드물게 사용했다.

조선 초기 문신 김안로(金安老)촌중서사(村中書事)’라는 시의 해설에 한식(寒食) 하루 전날을 소한식(小寒食)이라고 하고, 제일(除日)을 소세라고 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이다.

 

옛 사람들은 섣달 그믐밤을 지새면서 한 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맞이했다.

조선 중기 시인 간이(簡易) 최립(?)섣달그믐 지새는 술은 모름지기 초주와 백주라네(小歲觴須椒柏?)”라는 싯구를 남겼는데, 산초의 꽃이나 열매로 담아서 정월 초하루에 집안 어른에게 올리는 술이 초주(椒酒)이고, 측백나무 잎으로 만든 술이 백주(柏酒)이다.

새해 첫날 마시는 이런 술을 수주(壽酒)라고 하는데 장수를 비는 뜻이다. 수주(壽酒)를 세주(歲酒)라고도 하는데, 조선의 세주로는 도소주(屠蘇酒)가 유명했다. ()라는 악귀를 죽이는() 술이란 뜻인데, 조선 선조 때 문신 심수경(沈守慶)견한잡록(遣閑雜錄)’에는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인데,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신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2021년 새해 첫날, 즉 원단(元旦)의 날에 현 정치권의 권력을 탓해야 할 듯

싶다.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대해서 말이다.

 

파시즘의 전체주의 유산은 우리 안에 넓고 깊숙이 잔존해 있다. 권력자만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자들까지도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권력의 위력.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해야 직성이 풀리는 물신주의. 살아 남기 위한 나날의 각박한 생존 경쟁. 승리자가 되지 않고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초조함과, 승리하면 모든 것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이 모든 것 속에 파시즘은 문재인정권의 오늘에도 살아 있다.

이제 문제는 신체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저개발된 권력으로서의 군부 파시즘이 아니다. 과거의 군사독재정부의 권력통제가 국민들에게 육체적 압박을 가하는 폭력의 단편적 유형이었다면, 지금의 독재는 경제와 권리를 모두 앗아가는 식물인간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권만 끝나면, 한국정치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재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 재발한다 해도 새삼 그 폐해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가시적이며, 따라서 타격지점도 명백하다.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 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 교묘하게 일상과 정신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다.

 

필자는 이 현상을 '일상적 전체주의'라 부르겠다. 일상적 파시즘은 전체주의 체제로서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존재 양식을 달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체제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들, 설명하기 힘든 본능과 충돌들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테러'인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그러므로 잡식성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전제정이든 무엇과도 손쉽게 짝을 이룬다. 그것은 남과 북의 동질성을 확보해주는 연결고리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한반도의 속살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비대한 국가 기구와 혈연정 배타성에 사람들의 의식을 묶어두는 가족이 각각 큰 비중으로 사회의 위와 아래를 장악하는, 그렇기 때문에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시민 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국가 기구와 가족은 각각 위와 아래로 분절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닿아 있다. 연고주의가 최소한의 관료적 합리성마저 밀어 내고 국가 기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민간 저우가 들어서면서, '소통령'이라는 독특한 용어가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하고 싶은 말 또 하나는, 왜 한국의 신문들은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 관련 보도를 하면서, 각 당의 정강 정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허구한 날 몇몇 보스들의 이름만 거론하고 사람들의 계보만 말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중앙의 정치가 그러하다면, 지방 정치에서는 종친회, 동문회, 향후회의 등장이 가장 중요한 예측 지표가 된다.

전통의 위력 앞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은 곧 힘을 잃는다.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사상 운동이나 시민 사회 운동을 억압해 왔던 한반도의 20세기가 낳은 기형아이다.

이념적 지향이나 공적 이해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집단 행위는 가문이나 동창회 또는 향후회의 형식을 빌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도하게 성장한 국가의 권력 기구가 위로부터 파시즘을 강제하는 정치적 기제라면, 확대된 가족주의 혹은 연고주의는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담보하는 견고한 문화적 기제이다.

가족이나 지역의 특수 이해를 넘어서 공적 이해를 추구하는 시민 운동의 부재는 결국 국가 권력에게 공공적 이해에 대한 해석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의 덕목을 강조하는 국가 권력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보편적 이해라고 강변했다.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 또한 조국과 민족이라는 코드를 공유암으로써,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문제삼았을 뿐 국가 권력이라는 존재 자체가 정당한가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못했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추상의 헤게모니를 둘러 싼 국가 권력과 저항 운동의 투쟁 속에서,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은 관심의 뒷전으로 물러났고 규율 권력은 조용히 일상 생활 속에 침투했다. 그리고 끝내는 저항 운동 자체가 권력의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를 올 2021년엔 청산하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