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원교수의 베트남 친구 호롱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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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베트남 친구 이야기입니다.

 

닫혔다.

문이 닫혀 있다면,

바람이 세차게 두들겨서 열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면,

두들긴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다.

 

베트남 친구 호롱피,

2019년 4월 24일 호치민에서 그를 만났다.

약 27년만의 재회에 한참을 부둥켜 안고서 해후를 누렸다.

그의 3층집의 3층에는 잘 정돈된 손님용 방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나를 위하여 비워 두는 방이니 언제라도 오라고 했다.

 

1989년 호롱피를 독일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

한국에 대한 마음의 문이 꽁꽁 닫혀 있었다.

다가 가면 소리를 감추는 매미처럼,

한국인인 나에게 조금의 문도 열지 않았다.

 

그의 생일 날에

내가 학교 구내식당에 초대하여 커피메이커를 선물했다.

호롱피는 돈을 아끼느라 구내식당에서 식사도 안했다.

점심에도 집으로 가서 혼자 요리를 해먹었다.

생일 날에 구내식당에서 처음으로 독일식 식사를 했다.

그때부터 다가간 나에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조선의 왕 선조때에 역관 홍순언이 있었다.

명나라에 통역관으로 갔다가,

여각에서 소복을 입고 몸팔러 나온 류씨라는 여인을 만났다.

사연은 그러하였다.

부모가 동시에 돌아 갔는데 장례비용을 마련하려고 몸팔러 나왔다고 했다.

 

홍순언은 조건없이 금삼백냥을 주었다.

공금이었다.

조선으로 돌아 와 공금유용으로 5년간의 감옥살이라는 혹독한 댓가를 치렀다.

홍순언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다시 명니라에 사신으로 갈 때였다.

 

명나라의 대영회전에는

태조 이성계는 고려권신인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의 왕들이 이를 수정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여도 고쳐지지 않았다.

선조가 홍순언을 감옥에서 풀러나게 한 것은,

명나라에 가서 이를 고쳐 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고치지 못하고 오면 사약을 내리겠다고 했다.

 

홍순언이 명나라에 도착하자,

여각에서 금삼백냥을 조건없이 주었던 류씨가 남편과 식솔을 데리고 영접을 나왔다.

류씨의 남편은 예부상서 석성이었다.

마침 그는 대명회전의 내용을 수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이 200여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은 류씨 남편의 도움으로 이룬 것이다.

석성의 부인 죽자 류씨는 두번째의 부인이 된 것이다.

류씨의 은인 홍순언은 그 공로로 귀국하여 공신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신을 갔다.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기 위하여 홍순언이 또 사신으로 갔다.

류씨의 남편 석성은 군대를 관할하는 병부상서로 있었다.

갖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석성의 도움으로 명나라 군대의 조선의 파병이 이루어 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서 파병의 책임을 물어 석성은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석성은 두 아들을 불러 명나라에서는 죄인의 아들이 되어 더는 살 수가 없으니,

조선으로 가서 살아라고 하고서 나중에 옥사를 하였다.

그의 두 아들 중 둘째는 먼저 가야산자락의 성주로 가고

첫째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류씨와 함께 해주로 와서 일가를 이루었다.

석성은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선조는 석성이 죽자 평양에 사당 무열사를 지어서 그 은혜를 추모하게 하였다.'

 

한번 베푼 은혜는,

사라지고 마는 것그리하여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시들지 않고서 되살아 나는 것이다.

작은 베품 하나가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국비유학생이었던 호롱피.

장학금을 모아서 베트남에 집을 짓는다고 했다.

1991년 그 당시 총비용이 우리돈으로 약 600만원이 된다 했다.

호롱피가 모운 돈에서 모자라는 150만원을 내가 조건없이 주었다.

집을 완성하고서는 방 한칸을 언제라도 나를 위하여 비워둔다고 했다.

 

1992년 나는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만나,

호롱피와 헤어지고 독일의 남부 콘스탄츠로 이사를 했다.

그 후로는 단 한번도 호롱피를 만나지 못하였는데

드디어 베트남에서 호롱피를 재회한 것이다.

베트남 방문은 호롱피를 만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호롱피의 생일 이후에

우리는 거의 날마다 만나 우정을 쌓았다.

한달간 이용할 수 있는 철도패키지 티켓을 사서 스웨던, 덴마크도 같이 여행했다.

한달 내내 아침에 집을 나서서 밤늦도록 같이 다니면서 추억을 공유했다.

 

호롱피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서

유학 오기전부터 재직하고 있었던 베트남의 공과대학에서 36년간 재직하고 정년을 했다.

베트남의 정년은 만61세라서 57년생인 호롱피는 작년에 은퇴했다.

지금은 베트남의 기후변화위원회의 정부위원으로 있다.

 

흘러간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둘이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호롱피는 내가 1992년 독일에서 작별하면서 주었던 기념접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나도 호롱피가 그 해에 나에게 결혼기념으로 선물한 자개액자를 가지고 있다.

서로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2019년 5월 29일)

 

<호롱피(1)>

베트남친구가 떠오른다.

그 이름이 호롱피이다.

호치민과 같은 성이다.

 

독일유학을 같이한 친구이다.

가난한 조국에 절약이 몸에 밴 독일생활이었다.

한끼가 1500원 내외하는 교내식당에서 점심을 사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날마나 집에서 손수 요리를 하여 식사를 해결했다.

 

나는 호롱피와 구내식당(독일어로 멘자)에서 처음으로 식사를 같이했다.

그 녀석의 생일날이었다.

한끼가 2500원 정도 하는 고급식사였다.

 

호롱피는 독일정부 장학금으로 유학왔다.

농학을 공부하러 와서,

대학 연구소에서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장학금으로 월세만 지출하고,

거의 한푼도 쓰지 않고서 저축하였다.

가난이 몸에 배여 있었고 저축이 몸에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중국인과 인도네시아인들과에게는 친절했는데,

한국인인 나와는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도 애써 외면하였다.

 

나는 생각을 하였다.

베트남전쟁에서의 한국군인에 대한 원한이 쌓여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나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초청했다.

거절당했다.

 

그 대신에 그 녀석의 집으로 따라가서 저녁을 얻어먹었다.

닭고기에 양파와 베트남 향료가 들어 있는 찌개 하나와 밥이었다.

향료때문에 힘든 것을 참으면서 기분좋게 먹었다.

그렇게 해서 친구로서의 물꼬를 텄다.

 

드디어 그 녀석의 생일이 되었다.

나는 80마르크를 들어서 고급 커피메이커를 생일선물로 구입했다.

80마르크는 점심값으로 치면 27번에 해당하였다.

나에게는 거금이었다.

호롱피가 구내식당에서 처음 식사를 하는 생일날 그 선을 줬다.

 

호롱피가 한국인을 싫어하는 이유를 그제서야 들었다.

또박또박 '박정희'를 말하였다.

베트남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한국군인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거의 날마다 저녁이면 호롱피의 집으로 갔다.

밥을 같이 먹고 차를 나누어 마시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나도 처음과는 달리 베트남향료에 익숙해졌다.

내가 베트남음식에 적응할 즈음에 호롱피는 한국에 대한 원한도 누그러졌다.

내가 민간외교관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대학생에게 철도할인이 제공되었다.

한 달에 약 20,000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한 달 동안 광역시에 해당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역의 철도을 이용할 수 있다.

 

나, 호롱피, 인도네시아 친구 셋이서 방학 내내 그 지역 전체를 기차로 여행했다.

매일 아침에 각자의 음식 하나씩 싸와서 기차여행을 했다.

북쪽으로는 기차편으로 덴마크, 스웨덴도 같이 다녔다.

남쪽으로는 네델란드, 오스트리아도 같이 다녔다.

 

호롱피는 독일에서 저축한 돈으로 베트남에 집을 지으려고 했다.

방 네개의 집을 설계했다.

그의 아버지, 아내, 한 명의 아들에게는 저택인 셈이다.

문제는 건축비가 600만원이 소요되는데 150만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150만원의 큰 돈을 빌려줬다.

그 돈은 독일에서 4달 정도의 생활비였다.

조건도 달지 않았다.

언제라도 돈을 가지게 되면 갚던지,

그것도 어려우면 그냥 도와주는 것으로 했다.

 

베트남에서 집이 완성되었다.

호롱피는 나에게 늘 말했다.

자기식구들은 방이 3개만 필요하니 방 1개는 나의 것이라고 늘 말했다.

 

나에게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하는 독일친구가 있었다.

호롱피의 아들은 키가 자라지 않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나는 독일친구에게 호롱피의 아들을 도와달라고 했다.

며칠을 궁리한 독일친구가 기꺼이 도와주겠다 했다.

호롱피의 아들을 독일로 데려와서 치료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2달 정도의 시간을 그 성사를 위하여 매달렸다.

문제는 독일에서 아들의 보호자로 와야하는 어머니의 항공료는 마련할 수 없다 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여 끝내 성사하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호롱피 아내의 항공료를 내가 지불할 생각을 못한게 많이 아쉽다.

 

내가 북부독일에서 남부독일로 학교를 옮겼다.

2년간의 우정을 나눈 호롱피와도 헤어졌다.

이제 연락수단은 편지뿐이었다.

우리는 편지로 자주 소식을 나누었다.

호롱피의 아들은 병이 호전되어서 제법 키가 컸다고 햇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호롱피를 초청하려 했다.

시간의 잘 맞지가 않았다.

새해가 오면 연하장을 주고받는 뜸한 연락을 나누었다.

 

나는 2년전에 베트남의 호롱피집에 전화를 했다.

그의 아들이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보다 독일어를 더 잘했다.

나의 존재를 아는 아들이었다.

희귀병을 앓고 있던 그 아들이 이제는 다 커서 싱가폴에 유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친구는 한번 연락이 두절되고 나면 다시 이을 길이 없다.

호롱피와의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인생의 풍요로움 하나는 더 많다.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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