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둥거리는 갑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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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둥거리는 갑골



문맹의 전례 문자가 표정이라면
얼굴만 한 백지도 없다

마주한 두 손이 적는 문자는 하늘의 표기법을 따르고
미간의 간절함이 흐른 손바닥,
골 깊은 상형은 갑골문과 닮았다

반나절 따라가면 풀리는 난맥엔
가벼운 것들이 포개진 무게가 헐렁한 푼돈이 된다고 씌어있다

말끔히 치울 것이 없으면 쌓이는 것도 없어
문자의 소용이 다할 때 방향을 틀어나가는 파지
저기 웅크린 파지는
거친 바다에서 낱장 파도를 주웠을 것
거칠한 내력을 얼핏 읽어내는 눈은
미처 해독하지 못한 몇 권 갑골문임서를 다 따라 쓸 수 없다

헤엄친 만큼 들려주는 물살 같은 몇 줄 손바닥 예지가 흘러도
아직 몇 글자 새겨지지 않은
새파란 손을 올려다보는 눈들이 있을까

​미처 문자가 되지 않은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면
하루를 뒤집지 못한
거북이 두 마리가 배를 드러낸 채 버둥거린다

- 최연수, 시 '버둥거리는 갑골'


오래전 정화수 앞에서 빌던 할머니의 문자는 손바닥으로 쓰는 기도였을 겁니다.
간절함은 얼굴에 씌어 있어서, 심각함이 미간에 고여 있었지요.
글은 수월하게 읽고 쓰지 못했어도 표정으로, 마음으로 쓴 문자일 겁니다.
그 손바닥에 흐르는 거북이 등에 새겼다는 갑골문.
나는 아직 그런 연륜도 지혜도 없어 올려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손,
어설픈 갑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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