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새로운 보수주의’ 통해 사회통합 추구

페이지 정보

본문

 

(11-1) 새로운 보수주의통해 사회통합 추구

새로운 보수주의를 강조한 스탠리 볼드윈.

도전의 시대에 보수당을 이끌게 된 사람이 스탠리 볼드윈(1867~1947·수상 재임 1923~1924, 1924~1929, 1935~1937)이었다. 볼드윈은 지방의 제철업자 출신으로 보수당의 주류 세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볼드윈은 변화한 사회환경에 다음과 같이 대응해 나갔다.

첫째, 사회적 조화, 산업적 동반자 관계, 대결보다 합의를 중시하는 새로운 보수주의(New Conservatism)’를 주창하고 사회개혁에 나섰다. 그의 집권기간 중 남녀동등선거권 부여, 낙후지역 개발, 대도시 교통체계 개선, 의무교육 기간 연장, 과부·고아·노령연금 도입 등의 개혁이 이뤄졌다. 그는 디즈레일리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한 보수당 인물이다.

둘째, 보수당이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책임 있고 능력 있는 정당임을 부각시켰다. 볼드윈은 1926년 연설에서 상대 정당이 분파주의를 퍼뜨린 결과 영국인들은 사적인 목적만을 추구하게 되었다면서 보수당은 어떤 한 계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 통치하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학자 닐 R. 매크릴리스는 이 연설을 보수당이 1990년대까지 주도권을 잡게 된 시발로 본다. 보수당은 통치에 적합한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볼드윈의 주장은 보수당의 철칙이 됐다.

셋째, 볼드윈은 노동조합이나 새로 등장한 노동당에 대해서도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보수당 내 강경파가 주장하던 반()노조 입법에 반대했다. 1926년 탄광노조가 중심이 된 총파업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처럼 갈등으로 번지지 않은 것은 볼드윈의 태도에 힘입었다.

볼드윈은 1931년에는 보수당-노동당 연립정부를 성립시켰다. 처칠 등 당내 보수파들은 노동당을 빨갱이로 보았지만 볼드윈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당을 헌정의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이다.

넷째, 시대의 변화에 맞는 홍보 수단을 적극 도입했다.

1920년대에 보수당은 좌파독서클럽에 맞서 우파독서클럽을 만들어 보수 이념을 전파하고 지지자들을 조직화했다. 초롱불강연, 영화트럭 등 대중친화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막 각광을 받기 시작한 라디오를 자유당이나 노동당보다 먼저 활용했다. 덕분에 그는 많은 유권자가 얼굴을 기억하는 최초의 정당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항상 구닥다리 홍보만 하는 한국 보수당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볼드윈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다. 그는 요란하지 않고 건실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절제와 중용의 정치인이었다. 볼드윈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좌우 양극단 세력에게 넘어가던 1920~1930년대에 영국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 영국 수상을 지낸 해럴드 맥밀런 등 보수당 내 개혁파 정치인들이 볼드윈 시절에 정치에 입문했다.

1945년 총선 참패 복지국가를 받아들이고 젊은 피수혈

19457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전시(戰時)연립정부를 이끌며 전쟁에서 승리한 윈스턴 처칠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국민들은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을 선택했다.

노동당은 47.8%, 보수당은 39.8%를 얻었다. 보수당은 1935년 얻었던 432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13석에 그쳤다. ‘보수 대학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노동당은 1920년대에 짧은 기간 집권했다가 통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무너졌던 그 노동당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연립정부에 참여하며 국정수행 능력을 키웠다. 1942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세운 비버리지 보고서를 통해 복지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 주효했다.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개혁 편에 섰다.

일부 보수당 인사들조차 국민들에게 사회개혁을 주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에게 사회혁명을 가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처칠은 전쟁 수행에 여념이 없었고 많은 보수당 인사는 사회개혁을 사회주의로 간주해 거부했다.

보수당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노동당의 압승을 본 보수당 의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진보적 젊은 세대의 지지에 힘입어 노동당이 향후 20년은 집권할 것이라는 전망이 그들을 절망케 했다. 총선 패배 직후 열린 평의원 모임에서 한 보수당 의원은 넋이 나간 처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나는 보수당이 이제 완전히 죽었구나 하는 두려움을 갖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고 술회했다.

복지·국유화 등 수용

1945년 총선 패배 후 산업헌장채택을 주도한 리처드 버틀러.

40년래의 최악의 참패를 당한 보수당은 시대의 흐름을 일단 수용하는 한편 철저하게 당을 개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당의 중진 리처드 버틀러, 울튼 경, 데이비드 맥스웰-파이프, 퀸틴 호그 등이었다.

첫째, 버틀러는 로버트 필이 수상으로 있던 시기처럼 보수당은 이제 사회적 혁명에 우리가 제대로 적응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버틀러가 위원장을 맡은 보수당 산업정책위원회는 1947산업헌장을 발표했다. 여기서 보수당은 산업에 대한 국가 개입의 인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 노사 간 협력, 국민의료보험(NHS) 설립 등 복지에 대한 국가책임 등을 받아들였다. ‘산업헌장초안을 받아본 처칠은 이제 우리 당에도 사회주의자가 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1951년 정권을 탈환한 후에도 보수당은 노동당이 도입했던 경제·사회정책의 기조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은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집권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 때문에 보수당과 노동당의 경제·사회정책이 비슷했던 1945~1979년의 시기를 합의의 시대라고 한다.

둘째, ‘밀리언펀드(Million Fund)’운동을 통해 당 조직을 재건했다. 당시 보수당은 전쟁과 총선 패배를 겪으며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당 의장 울튼 경은 1947년 당원들에게 100만 파운드를 모금해 중앙당에 헌납하는 운동을 제안했다.

당시 100만 파운드는 쉽게 모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모금운동 과정에서 침체된 지구당 조직들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48년 밀리언펀드운동은 당초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중앙당은 든든한 정치자금을 확보했고 당원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보수당원은 1946937000여 명에서 195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