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궤멸된 한국의 보수정치 어떻게 할 것인가 ? 영국 보수당에서 한국 보수정당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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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궤멸된 한국의 보수정치 어떻게 할 것인가 ? 영국 보수당에서 한국 보수정당의 길을 묻다

 

201759일 실시된 19대 대통령 선거와 20186.13지방선거에서 종래 한국

보수 세력을 대표해 오던 자유한국당은 참패했다.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진 보수정당이 이렇게 적은 표를 얻은 것은 처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보수 세력은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여기에서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영국 보수당의 끈기와 내구력이다. 토리(Tory)라는 이름의 당파로 기원을 연 것을 따지자면 340년이지만, 보수당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로부터는 190년이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당은 건재하다.

건재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에도 4분의 3 가까운 기간을 집권당으로 군림했다. 미국·프랑스·독일 등 구미(歐美) 선진국 가운데서 이렇게 압도적 위상을 자랑하는 정당은 없다. 그것도 스스로 보수당(Conservative Party)’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거둔 성과라는 점이 경이롭다.

다만 340여 년간 영국 보수당이 탄탄대로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고,

60년 여간 정권을 잃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1830년대 이후 보수당은 대략 7번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철저한 자기 개혁을 감행해 화려하게 재기(再起)했다.

1.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 로버트 필

시대적 배경

1783년 이후 1830년 초까지 영국 정치는 간혹 휘그당이 정권을 잡기는 했어도 토리당이 장악해 왔다. 이 기간 영국은 윌리엄 피트 Jr.(피트)의 영도 아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늘도 있었다. 이 시기의 정치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의회 및 선거제도의 개혁이었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상공업 계층과 노동자 계층이 등장했다. 농촌인구는 줄고 도시인구는 늘었다. 그런데도 선거구는 농업이 산업의 전부이던 17세기 스튜어트 왕조 시절에 만들어진 그대로였다.

상공업·노동자 계층에게 투표권을 확대하고 농촌 선거구를 줄이는 대신 도시 선거구를 늘리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의원 대부분이 지주·귀족이었던 토리당은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토리당은 나폴레옹전쟁을 치르는 동안 법과 질서를 내세워 정치적 자유를 통제했던 타성에 젖어 있었다.

둘째, 곡물법 폐지 문제였다.

1815년 제정된 곡물법은 외국산 곡물에 고율의 관세를 매겨서 국내 농업을 보호하는 법이었다. 이는 토리당의 주류 세력인 지주 계층에게 유리했다. 비싼 값으로 곡물을 소비해야 하는 도시 노동자나 상공인들의 입장에서는 악법이었다.

상공인들은 값싼 외국산 곡물을 수입하는 대신 영국이 우위인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는 자유무역체제를 선호했다. 이들은 1838년 공업 중심지이던 맨체스터에서 반()곡물법연맹을 만들었다.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반곡물법연맹 주도자인 제임스 윌슨이 창간한 것이다.

토리당은 이런 문제들에 소극적으로 임하다 1830년 총선에서 패해 휘그당에 정권을 내줬다. 그레이 수상이 이끄는 휘그당은 개혁에 호의적인 새 국왕 윌리엄 4세의 지원 아래 1832년 개혁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농촌 선거구는 대거 폐지되고 도시 선거구가 늘어났다.

도시 중산층에게 새로 투표권을 주면서 유권자 수가 약 50만명에서 8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개혁에 저항했던 토리당은 1832년 총선에서 심판을 받았다. 휘그당 및 개혁 동조 세력이 483석을 차지한 반면, 토리당은 175석에 그쳤다. 토리당은 끝장난 것 같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로버트 필(1788~1850·수상 재임 1834~1835, 1841~1846)이다. 로버트 필 경(Sir Robert Peel, 2nd Baronet, 178825일 출생 ~ 185072일 타계)은 영국의 정치인이자 보수당의 당원으로, 연합왕국의 총리를 두 번(1834~1835,1841~1846) 역임하였고, 내무장관도 두번 (1822~1827, 1828~1830) 역임하였다. 현대 영국 경찰의 아버지이자 현대 보수당의 설립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된다.

 

필은 면직물 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공업 가문 출신이었다. 전임자인 웰링턴이 전통 귀족이자 전쟁영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출신 배경부터 달랐다.

첫째, 필은 도시 상공인들에게 접근했다. 1834년 발표한 탬워스 강령이 그것이다. 필은 자기 지역구인 탬워스의 유권자들 앞에서 발표한 이 선언에서 반동(反動)과 혁명을 모두 거부하면서 1832년의 개혁을 존중하고 추가적인 개혁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이 선언은 선거 직전 정당이 정강·정책이나 선거공약집을 발표하는 선구(先驅)가 됐다.

둘째, 당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정비했다. 필이 1830년대 초부터 토리대신 보수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보수당으로 당명(黨名)이 바뀌었다. 조직사업을 담당하는 유급 직원을 채용하고 지구당 조직을 구축하고 원내총무(Chief Whip)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필이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필은 1841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국왕이 지명한 사람이 아니라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가 수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곡물법 폐지

수상이 된 필은 1846년 곡물법 폐지를 단행했다. 여기에는 그 무렵 발생한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지주와 소작인들은 곡물세가 폐지되면 영국의 농업은 망한다고 반대했다. 보수당 내 농촌 출신 의원들이 이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필은 보수당 내 개혁 세력과 자유무역주의를 지지해 온 휘그당의 도움을 받아 곡물법 폐지에 성공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이 ()이 나라를 살렸다고 칭송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보수당 내 벤저민 디즈레일리 등 보호무역주의 보수파는 휘그당과 결탁해 1846년 필 수상 정부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필은 보수당이 무조건 기득권을 옹호하는 반동집단이 아니라 내홍(內訌)을 감수하고라도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었다. 필은 지금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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