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행정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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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   2016.03.1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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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행정의 허상>

 

이 헌 석(서원대학교 법학과, 조교수)

 

◇ 이 글은 전국교수공제회보 제21호(2000.8.15.), 7면에 게재된 것이며, 이교수의 협조로 법치시론 제4호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행정이 법에 의해 집행되어야 한다는 법치행정의 원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권위주의적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행정현실 속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특히 공익이란 이름으로 다수의 힘을 추종하는 행정권으로부터 소수의 보호와 급부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정에 대한 법의 지배는 반드시 실현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행정현실을 보면 법치행정의 실현이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무법행정, 탈법행정, 그리고 무늬만 법치행정인 현상들을 어렵지 않게 접하면서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우선 대부분의 일선행정은 법치행정이 아닌 명치행정(命治行政)이라는 점이다. 수준높은 법령들과 조례들이 시행되고 있지만, 이것들이 전달과정을 거쳐 일선 행정담당자에게 이르는 동안 법치행정은 사라지고, 훈령이나 직무명령에 의한 행정이 되어 버리고 만다.

훈령이나 직무명령에 의한 사무처리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좋은 법령이나 조례에도 불구하고 훈령이나 직무명령의 내용은 여전히 과거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법령 및 조례는 개선되어도 주민이 받는 고통은 여전하다.

이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우리 법학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지금껏 정연한 논리와 법률내용에만 관심을 가져왔을 뿐, 이것들이 정작 현실에서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음을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두번째는 외형적으로 법률의 요건을 맞추고 있지만, 실재로는 법의 기본취지를 훼손하는 행태도 있다. 단적인 예가 각종 위원회제도일 것이다. 행정관련법률은 각종 행정을 행함에 앞서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자문, 심의, 의결을 의무화하고 있고, 실제로 거의 모든 행정청에는 수 십 개의 위원회가 민간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위원들의 상당수는 교수들이다). 따라서 위원회가 법의 본래 취지대로만 운영된다면 법치행정의 실현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이렇게 중요한 위원회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활동이나 행정통제보다는 행정의 정당성만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되어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위원의 선임권이 기관의 장에게 있기 때문이며, 기관의 장은 자신의 주변인물 중에서, 절대 무리가 없는 인물(?)을 위원으로 위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통제의 대상기관이 통제위원을 선임하는 기이한 모습이며, 이러한 위원들에게서 행정통제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법의 취지에 부합하는 위원회가 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기관의 장에 의한 위원선임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세번째는 행정권이 정면에서 법을 위반하고 비리와 유착되는 경우이다.

물론 과거부터 불법․탈법의 행정사례는 있어왔고, 근절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시대를 맞이하여 선거로 뽑힌 단체장들이 각종 비리와 불법에 연루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 출범이후 모든 지역에서 향락․탈법 영업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지만, 단속 및 적발 건수는 감소되고 있고, 각종 비리로 인해 단체장의 구속 및 기소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행정의 현주소이다. 단체장의 미세한 불법사건에 대해서는 수사자체가 용이하지 않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단체장의 탈법․불법적인 행정사례는 엄청날 것을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실현할 방법은 없을까?

의회에 의한 행정통제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의원들의 면면을 볼 때 지나친 기대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주민들의 참여를 통하여 행정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법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정에 대한 주민통제가 가능하려면 행정정보의 공개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각종 제한으로 인해 필요한 행정정보를 획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비록 의혹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감사제도가 없기 때문에 부당․불법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탈법적인 행정을 확인했다고 할지라도 적절한 제재의 방법도 없다. 결국 행정통제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주민참여의 방법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법치행정은 철없는 교수의 헛된 외침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왠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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