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헌법을 흔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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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2016.03.1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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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시론 제33호]

법치시론 제33호는 김효전 (동아대교수·헌법학·한국공법학회장)의 동아일보 2002. 7. 15 헌법의 눈을 전재한 것임을 밝힌다.

 

 

누가 헌법을 흔드는가

 

제헌절을 며칠 앞두고 정계 일각에서 느닷없이 개헌론을 들고 나왔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심심하면 헌법 개정 운운하는 아주 고질적인 병에 걸려 있다.

이처럼 별다른 이슈가 없으면 튀어나오는 개헌론의 역사는 이승만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세상이 다 아는 선각자요, 건국의 아버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는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서 헌법을 헌신짝같이 내버린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필요하다면 헌법은 언제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꿀 수 있다는 그의 통치철학은 그 이후에도 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부터 거의 100년 전 젊은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는 훌륭한 책을 집필했다. 그것은 간수의 눈을 피해 가면서 아무런 참고자료도 없이 오로지 자신이 읽은 책과 기억에만 의존해서 써내려 간 것이다. 그의 박학다식함과 절절한 애국심은 읽는 이로 하여금 비장한 결의와 각오를 새롭게 하며 가히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거기에는 ‘헌법정치의 효험’과 ‘미국 백성의 권리 구별’이라는 제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당시의 다른 어떤 헌법 교과서나 정치학 책보다도 상세하며 어떤 신문의 논설보다도 계발적인 것이 풍부하다.

한 사람의 헌법학도로서 나는 이승만의 천재적인 저술에 크게 감동을 받은 일이 있다. 그처럼 아는 것이 많고 영국의 입헌 정치를 부러워하고 기본권이 잘 보장된 미국을 ‘극락’이라고까지 표현했던 이승만의 통치는 독재로 끝나고 말았다. 알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행하기는 쉽지만 알기가 어려운 것일까.

우리 헌정사에서 두 번째로 헌법을 유린한 사람은 박정희다.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은 꼭 두 달 뒤에 맞은 제13회 제헌절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객관적이어야 할 헌법의 모든 규정은 오로지 그때그때의 집권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침해되기가 일쑤였고…부정과 부패는 횡행하고, 국민의 빈곤은 확대되어 그 어떠한 수술을 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것을 구출할 수 없는 말기적 현상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5·16의 불가피성과 당위성을 스스로 변명하고 강조하였지만 그 후유증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오늘날 도처에 부정과 비리가 만연하게 된 원죄는 바로 군부 쿠데타에서 시작한다.

박 장군을 비롯한 일부 정치군인들은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민정에 참여하였다. 그 후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른바 ‘대통령 특별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지하였다. 또다시 물리적인 힘으로 헌정질서를 유린하여 제2의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유신(維新)’이라고 일본식으로 작명하였다.

그 후 박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진 유신헌법은 박 대통령의 피살로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다.

그 후 권력의 공백기에 등장한 신군부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온 국민의 염원을 저버리고 계엄과 독재로 통치하였다. 신군부의 핵심인 전두환 장군은 유신 헌법상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보선되고, 새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헌법은 1회용으로 끝났다.

이처럼 짧지 않은 우리의 헌정사에서 헌법은 집권자들에 의해서 여러 차례 유린된 슬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국민은 반세기에 걸친 헌법정치와 군사독재를 통해서 별의별 깜짝쇼를 다보고 속아왔다.

국민을 놀라게 하거나 선심을 쓰거나 눈과 입을 가리게 하거나 가르치려고 드는 과거의 저열한 통치술로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도를 걷는 헌법정치를 해야 한다.

모든 제도는 물론 사람이 만든 것이고 거기에는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한두 가지의 단점을 들고 나와 헌법을 개정하자는 속셈은 무엇인가. 새 판을 짜자는 것일까. 지금의 헌법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좋은 정치를 잘 할 수 있다. 제도가 아니라 이를 운영해 나가는 사람이 문제란 것은 이제 국민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선례를 모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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