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안지는 대통령책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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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2016.03.1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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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시론 제32호]

법치시론 제32호는 이석연 (변호사·동국대 겸임교수·전 경실련 사무총장)의 조선일보 2002. 7. 12 시론을 전재한 것임을 밝힌다.

 

'책임' 안지는 대통령책임제

 

명색이 헌법을 공부했고 헌법재판 실무에 종사해온 사람으로서 헌법의 해석과 운용에 대해서 죽 의문을 품어온 것이 한 가지 있다. 대통령의 책임에 관한 헌법제도와 헌정 운용의 실제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현행 헌법상 정부형태는 학자에 따라 다소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통령제 정부형태라는 데에는 일치되어 있다. 때문에 국정운영의 실책이나 파탄에 대해서는 국정 전반에 걸쳐 헌법상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 대통령이 제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함은 당연한 헌법적 요청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국정파탄이나 심지어 국난을 초래할 정도의 국정 운영의 실책에 있을 때에도 국무총리 이하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고 대통령은 마치 국정운영의 결과에 초연한 것처럼 대처해 왔다. 대통령은 ‘역사적 평가나 책임’만 지는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내각은 내각책임제 하에서의 국정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우리 헌법에 내각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지위에 있을 뿐, 국정에 관한 최종적인 헌법상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파탄의 고비마다 국무총리나 행정각부의 장이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치부한 것이 헌정의 관행이었다. 그러나 국무총리를 정치적인 방탄벽으로 하여 대통령이 국정운영 결과에 초연하도록 한 것은 잘못된 헌정운영의 관행이다. 국무총리는 내각제의 수상이 아니다.

과거 전제군주시대의 군주는 사망하거나 쿠데타로 축출되지 않는 한 평생 그 지위를 누렸다. 현행 헌법상 대통령 역시 임기가 절대적으로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국가원수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내세워 3권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허상을 국민에게 심어온 것이 사실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대통령은 내란·외환죄를 범하거나 탄핵에 의하지 않는 한 재임 중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도 않고 물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런가? 물론 대통령이 재임 중 국정운영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명문의 헌법규정은 없다. 그러나 대통령제 정부형태의 본질상 대통령이 국정운영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자라는 점과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하도록 한 헌법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때에는 임기중에라도 그 진퇴를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의 취지라고 본다. 적시에 권력을 이양함으로써 ‘국가의 계속성’을 수호하는 것도 헌법상 부과된 대통령의 직무다.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 기타 사유’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권한대행자와 후임자의 선거에 관한 규정을 헌법에 직접 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때에도 대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수년 전에 사법부의 수장이 부동산 투기의혹이라는 여론에 밀려 6년 임기의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것을 비롯하여 헌법상 임기가 보장된 공직자가 각종 권력형 부패와 비리에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도중하차한 적지 않은 경험을 갖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만이 예외라는 막연한 인식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허상을 만든 것이다. 최근에는 권력형 비리의 주범이 마치 대통령제인 것으로 돌려 이를 빌미로 한 정략적 개헌론까지 나오고 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에 당선만 되면 모든 것을 움켜쥘 수 있다는 후진국형 통치권 개념에 사로잡혀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온 나라, 온 국민이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듯한 상황이다. 사실 헌법상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의 가장 큰 심부름꾼(公僕)이다. 국민의 으뜸가는 공복으로서 심부름을 잘못하면 언제든지 주인에게 스스로 책임을 지거나 국민투표 등을 통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제 심부름꾼이 주인의 지위를 대신하면서 문제가 있어도 그 밑에 고용된 자들만 책임지는 헌법 역행적인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아니 된다. 대통령의 지위와 책임에 관한 이런 왜곡된 현실인식을 바로잡아 평범한 헌법적 상식을 회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권력의 인격화를 막고 선진정치로 가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대선후보들에게 권하고자 한다. 재임 중 현저한 국정파탄이나 혼란으로 국민적 신뢰를 상실하면 언제든지 심부름꾼으로서 역할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이를 국민앞에 공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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