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派獨)광부의 작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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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석종현] 파독(派獨)광부의 작은 소망

동아일보, 기사입력 2013-05-08 03:00:00 기사수정 2013-05-08 03:00:00

 

이달 4일 저녁(현지 시간) 파독 광부들이 일했던 독일 보훔 시에서 파독 5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1000여 명의 광부 간호사가 모였다. 독일 노동부 차관까지 참석해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라인 강의 기적’도, 독일 경제의 발전도 없었다”며 고마워했다. 나는 이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지난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1963년 파독 광부 제1진으로 서독행 비행기를 탄 사람 중 하나다. 당시 파독 광부는 500명을 모집하는데 4만600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였다. 서독 항공기가 우리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이 바다를 이뤘다. 당시 파독 광부들은 지하 1000m 이상의 깊은 땅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온몸으로 받으며 일했다. 서독 광부들은 하루 8시간만 했지만 우리는 10시간이 넘게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그 과정에서 나는 왼 새끼손가락이 뭉개졌다. 또 첫아이가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것도 나중에야 아내에게서 듣고 알았다.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인 내가 너무 슬픈 소식을 접하고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서독에서의 광부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갱도는 40도를 오르내리며 숨 막힐 정도로 덥고 답답했다. 옷은 땀으로 범벅이 돼 속옷 차림으로 일해야 했고, 장화 안은 땀으로 가득 차 몇 번이고 고인 물을 쏟아내야 했다. 갱도 안에 있는 4L 용량의 식수통은 금방 바닥이 났다. 그렇게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천장에서 떨어진 돌 때문에 상처가 나기 일쑤였고, 상처에 석탄가루가 들어가 아물기를 반복하면서 검은 석탄 자국이 그대로 피부에 남기도 했다. 땅을 파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 생각과 ‘인간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끝없는 회의에 고통스러웠던 날도 부지기수였다. 당시는 대한민국 실업률이 40%에 달했고,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이 국내에서 웬만한 직장의 1년 치 연봉과 맞먹는 액수였으니 지원자가 몰리는 것이 당연했다. 필자는 당시 중앙대 법대를 졸업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정말로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파독 광부에 지원했다. 3년여를 보낸 어느 날 귀국을 앞두고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숙소 인근에 살던 독일인 친구가 법학 공부를 할 수 있게 주선을 해준 것이다. 공부에 필요한 돈은 광부로 일하면서 모은 돈과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어렵게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벌써 50주년이 됐다니 감회가 새롭다. 올해는 또 한국과 독일이 수교를 맺은 지 130년이 된 해이기도 하다. 지난 시간 겪어 온 아픔이 결코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우리 세대들은 국내든, 국외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개인적 경험과 고통을 다른 사람과, 그것도 시대가 다른 지금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비록 취업과 생활고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극단적 비관론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 ‘성공’이란 겉치레보다 진심으로 자신이 하고 싶고 바라는 것을 찾기를 권하고 싶다. 지금 가진 고민과 불안 중에 혹시 남보다 좋은 직장, 남보다 높은 지위, 좀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종횡무진으로 찾아 남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뒤떨어진 것 같으면 마치 낙오자가 된 것처럼 자포자기하는 점이 있는지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이제 대한민국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됐다. 과거의 경험을 다시 할 필요는 없지만 그때 그 어려웠던 시절을 이겨냈던 정신만은 지금 젊은이들이 잊지 말았으면 한다.석종현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토지공법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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