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하던파독광부가 토지공법학 권위자로 우뚝서다

페이지 정보

본문

쏟아지는 땀 묻은 속옷 쥐어짜며 삽질하던파독광부가 토지공법학 권위자로 우뚝서다

<인터뷰>석종현 한국토지공법학회장 "지금도 얼굴엔 '광부 훈장'" "독일 방문한 박 대통령 연설에 감동…독일행 이후 삶은 덤이다"

이충재 기자 cj5128@empal.com | 2013.04.05 08:36:42

◇ 석종현 한국토지공법학회장.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석종현 토지공법학회 회장의 왼손 새끼손가락은 뭉그러져 아직도 온전히 펴지지 않는다. 파독광부 시절 지하갱도에서 무너진 철근에 짓눌려 생긴 ‘훈장’이다. 당시 그는 손가락이 완전히 낫기도 전에 다시 갱도로 들어가야 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1963년 파독광부가 독일 땅을 밟은 지 올해로 50년. 그들이 과거 지하갱도에서 흘렸던 땀과 눈물은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석 회장도 당시 산업역군으로 독일로 파견된 청년들 가운데 한명이다. 독일 튀빙앤대학교 법학박사, 한국법제발전연구소 소장, 단국대학교 법대학장, 법무대학원 원장, 석좌교수,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그의 이력서만 보면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은 법학자의 모습이지만, 상처투성이인 손은 그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데일리안’은 3일 오후 서울 역삼동 토지공법학회 사무실에서 ‘교수가 된 파독광부’ 석 회장을 만났다. '하루 세끼 먹기 위해' 독일로 떠난 청년 1963년 12월 21일 대한민국의 청년 123명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파독광부’란 단어는 외화벌이에 나선 젊은이들의 도전이라는 뜻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파독광부 모집공고에 응시 경쟁률은 현재 공무원 시험 경쟁률을 방불케 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응시자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실업률이 40%에 달했고,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않던 시절이다. 무엇보다 서독 광부의 한달 임금은 국내 일 년치 연봉과 맞먹는 액수였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로 올라와 중앙대학교 법대를 졸업했으나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했다. “1971년 나는 수출된 노동자로 포장되어 보릿고개의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하루 세끼의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먼 외국의 광부로 선택되어졌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독일에 도착한 뒤 광부로 지낸 기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갱도의 깊이는 800m 이상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답답했다. 최고기온은 40도에 달해, 나중엔 땀범벅인 옷을 다 벗어버리고 속옷만 입고 일을 했다고 한다. 장화 안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고, 4리터 용량의 식수통은 순식간에 바닥났다. 그렇게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했다. “쏟아지는 땀에 팬티를 작업장에서 다섯 번이나 짜서 입어야 하고, 장화 속의 물을 열 번 이상 털어 쏟아내며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보면, 식수용 물통은 금방 바닥나 목은 늘 타는 듯 했다. 한 삽질에 눈물 한 방울, 두 삽질에 눈물 두 방울... 마음속으로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들이 떠올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서 살 수 없는 것인가’하는 끝없는 회의뿐이었다.” 석탄가루가 박히길 반복하여 생긴 '광부문신'…"죽지 말고 살아서 올라오라!"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잘살아보자’는 꿈 하나로 이국땅에서 광부가 되어 흘렸던 땀과 눈물을 이야기하던 그의 목울대는 울렁거렸다. 인터뷰 중 독일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생이 조국 선진화의 밑거름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뭉그러진 새끼손가락도 그에겐 ‘훈장’이었다. ‘훈장’은 온몸 곳곳에 있었다. “당시에 안전모를 쓰고 있었지만, 천장에서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기를 반복하면서 석탄은 그대로 피부에 남아있었다”고 했다. 이른바 ‘광부문신’이다. 그는 이어 “일을 마친 뒤엔 몸에 박힌 석탄 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며 “지금도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면서 탄을 캐냈다”며 “막장일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었다. 오죽하면 작업을 시작하며 ‘글뤽 아우프(Glu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고 말했다. 실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 8000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만1000여명이 독일의 광산과 병원에서 일했고,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그는 파독광부로 고된 하루를 보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에 또 한번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그는 “함보른 탄광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때 대학 재학중이었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가슴 속에 응어리 진 서글픔이 눈물로 진화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또박또박 읊어 내렸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백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며 “감격에 찬 광부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고 했다. 그는 “내 나이가 어느덧 고희가 됐지만,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며 “박 대통령은 광부들과의 약속을 지켰고, 가난과 망국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한을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켜 번영의 터전을 이룩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찌 생각하면 수출된 한 노동자의 애환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당시 수출된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한국적 경제발전도 없었을 것”이라며 “한국의 젊은이들을 온 세계로 수출한 대가로 산업부흥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내가 빛바랜 여행용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독일로 떠나면서 ‘3년이면, 3년이면’하고 중얼거리며 그 으리으리한 김포공항을 출발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라며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세상도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지금도 뜨거운 여름이면 갱도에서 땀 흘리던 옛일이 떠오른다. 매일 목숨을 건 전투를 했다”고 회고했다.

◇ 석종현 한국토지공법학회장.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석종현 한국토지공법학회장.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석종현 한국토지공법학회장.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독일로 찾아온 아내, 그 옆에 아들은 없었다"

 

광부 노동자 생활을 3년간 한 그는 귀국을 앞두고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자신의 숙소 인근에 살던 독일인 친구의 도움으로 법학공부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 이미 한국에서 학위를 받은 그였지만, 선진문화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는 그동안 광부로 일하며 아끼고 모은 돈을 학비로 쓰기로 결심하고, 우선 1974년 루르대학교에서 어학과정을 마쳤다. “독일어부터 완벽하게 해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어학원과정을 이수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광부로 일한 두 달치 월급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1975년에 슈파이어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행정법의 영역 중에서도 행정작용법에 속하는 행정계획법 분야에서 1978년 10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일에서 공부는 10년 이상이 필요한데, 나는 2년 반만에 마쳤다”며 “등록금 역시 장학금을 받아서 해결했다”고 했다. 학업을 이어가던 중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답변’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한 일화도 털어놨다. 당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그는 최종 면접심사에서 ‘대한민국의 독재정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정치적 사정이 있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던 답변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장학금 지급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그렇게 대답한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이후 1982년에 독일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Alexander von Humboldt Stiftung)의 장학금을 받아 본대학교 법과대학에 1년간 교환교수로 근무했다. “훔볼트 재단 장학금은 학자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었다. 이 과정에서 학문활동을 위한 많은 연구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앞서 독일에서 학업을 하기로 결심한 뒤 커다란 시련도 찾아왔다. 그는 한국에 있던 아내와 아들을 불러 함께 독일에서 가정을 꾸리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한국을 떠난 직후 태어난 아들이 사고로 사망했고, 아내만 홀로 독일에 도착한 것. “아내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독일로 왔다. 내가 힘들까봐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독일광부'에서 '독일이론 무장한 법학자' 독일에서 공법학의 선진이론으로 무장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단국대학교 법정대학에 전임교수로 부임했다. 독일에서 쌓은 학식과 인맥은 국내 법학이론을 새롭게 정리-정의하는데 주효했다. 1983년 ‘신토지공법론’이라는 저서를 출간했고, 이 책은 당시의 공인감정사 수험생들에게 베스트셀러로 인정받았다. 토지공법의 영역에서 이론이나 법리가 제대로 정리 되어 있지 않은 시점에서 독일이론을 모범으로 한 그의 저서는 미개척의 학문분야인 새로운 영역에서 토지공법학 학문영역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1986년에 일반행정법(상), 1988년에는 일반행정법(하)을 출간했고, 법학도들에겐 그의 책이 ‘교과서’로 통했다. 그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행정법교재들은 일본의 교재들을 모범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독일의 행정법이론들을 직접 도입하여 우리의 이론과 접목시켜 새로운 이론동향을 만들어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1986년 한국공법학회가 수여하는 제1회 학술장려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됐다. 단국대학교에서 법학 연구활동도 독일에서 학업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당시 단국대 학생들 사이에선 그의 법학대학 3층 연구실이 ‘등대’로 통했다고 한다.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아 붙여진 별칭이다. 그는 일반대학원 법학과 주임교수와 법학과 학과장, 법과대학 학장, 노사관계대학원 원장, 행정법무대학원 부동산법학과 주임교수, 단국대 부설 법학연구소 소장, 행정법무대학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 석종현 한국토지공법학회장.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법률 공직사회에 창조적인 사고 필요해…독일행 이후 삶은 덤이다" 토지공법학 분야에선 그가 국내 선발주자라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이 없다.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즐비한 법학계에서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에 견제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묵묵히 학자로서 연구결과로 보여줬다. 특히 그는 지난 1994년에 한국토지공법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선출된 이래 지금까지 회장의 직을 맡고 있다. 학회는 행정법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중심이 된 전문학술단체로 현재 3000명에 달하는 회원을 가진 거대학회로 성장했다. 학자로선 더 이를 곳이 없어 보이는 그는 시선을 정부의 정책구상쪽으로 돌렸다. 이미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 위원과 국회 헌법연구 자문위원회 자문위원, 국토해양부장관 정책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낸 그는 “공직사회에 창조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연구해온 분야와 정부정책의 교집합 지점인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운영방안과 관련, “막대한 공상의 부채감축을 위해 선투자-후회수 사업방식의 개선이 필요하고, 직접투자방식에서 간접투자방식으로 전환하는 ‘리츠방식’ 도입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공사의 임대사업 등 정책사업의 수행과 막대한 사업자금의 조달로 인해 채산성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며 “현재 공사의 연이자의 지출이 3조원이 넘어 사업결과에 따른 당기순이익을 초과해 국내 자체수익으로 부채의 원금상환이 어려운 실정이고, 근본적인 부채해소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토지조성과 주택건설 등에 소요되는 사업비의 조달과 이자, 투자 등의 위험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간투자의 리츠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며 “또 공사의 택지 판매촉진과 민간자금 활용을 통해 공사 재무부담을 해소하고, 매입확약으로 매입한 주택을 건설 대체형 임대주택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해외사업의 경우, “그동안의 사업은 주로 도시개발사업 타당성 조사, 마스터플랜 수립 등에 편중되어 있어서 본사업의 시공에 참여하지 못해 수익성창출에는 한계성이 있었다”며 “기술적 용역사업 이외에 실제 시공분야에 참가하고, 민간건설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역할을 배분하는 방식 등 턴키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인터뷰 내내 “창조적 사고”를 강조했다. ‘딱딱한’ 법학을 전공한 그는 “확고한 헌법과 법률지식을 바탕에 둔 창의적인 사고가 공직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40여년 전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던 열정이 남아있었다. “독일행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연히 열정적으로 되어지더라.”[데일리안 = 이충재 기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