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박근혜, 희망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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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2   2016.03.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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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박근혜, 희망을 말하다

 

시사경제 회장 석종현(미래행복포럼 이사장)

 

문제는 지금부터다. 가뜩이나 ‘수세에 몰려 있는’ 자신의 캐릭터로 인해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여준 박근혜후보가 논란의 쓰나미를 겪고 난 뒤에도 다시 잘 적응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일 수 있지만, 단언하면 위기의 순간에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이 박근혜에게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 간단한 진리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박근혜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기도 하다. 또한 다시 돌아온 현재의 그를 향한 국민들의 목소리는 긍정적인 응원의 목소리만은 아니기에, 그를 향해 물음표를 가지고 있는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지는 그에게 남겨진 숙제다.

 

국민을 향해 포효했던 장문의 역사인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결국 현재 벌어진 모든 사태는 ‘잘’ 하려다 꼬여버린 것이다. 따라서 다시금 이를 악물고 고난을 극복해야 할 박근혜는 지금과 같은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그를 믿고 기다려준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박근혜후보에게 진언을 하고자 한다.

 

작금의 시대는 인문학의 시대이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한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져본다. "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대한민국을 말할 수 있는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대한민국에 시선을 돌리고자 한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다.

 

지금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희망으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박근혜후보에게 드린다. 계속되는 불안한 현실에 법학자의 치열한 질문이다. 그 질문은 이렇다. "박근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① 첫 번째 질문 : 문재인후보,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국민 모두의 정치인인가?

③ 세 번째 질문 : 대권쟁취의 성공은 여전히 가능한가?

④ 네 번째 질문 : 100% 대한민국은 가능한 것인가?

⑤ 다섯 번째 질문 : 과거 역사에 대한 관점 중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⑥ 여섯 번째 질문 : 저자거리 네거티브의 정체는?

 

정치를 필자의 표현대로 하면 '사람의 무늬'라고도 한다. 그러니 정치학을 국민들의 삶에 대한 물음과 해답이라 보기도 한다.

물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치에 대한 물음과 해답이지만 어디까지나 국민들의 삶에 관한 텍스트를 붙잡아야 한다. 경제 텍스트, 역사 텍스트, 문화 텍스트, 교육 텍스트 그러니까 경영문교란 '앞선 구절 텍스트'의 줄임말이다.

 

그렇다면 텍스트를 가지고 뭘 할까? 텍스트를 가지고 국정운영이 무엇인지,

대통령이 하는 일이 뭔지 되묻는 게 정치학의 가장 정치학다운 일이다.

텍스트 없는 물음은 맹목이고 물음 없는 텍스트는 공허하다. 배움과 생각 중 하나라도 소홀하면 아니 된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했다. 정치지도자란 텍스트를 배우는 것이다.

 

철학을 예로 들자면, 철학의 역사는 철학 텍스트를 바탕으로 철학이 뭔지 묻고 답하며 논해온 역사, 자기가 하는 일을 되물어 온 역사다. 칸트는 짜임새가 탄탄하고 자리가 넓은 비판 철학 체계를 세우며 '철학의 혁명가'가 되었다.

그 혁명의 시작은 그 때까지 이루어진 철학적 성과를 뿌리부터 비판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일이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철학으로 철학의 사명을 바꾸려 한 마르크스, 철학의 전체 역사를 언어의 미망(迷妄)이라 일갈하며 언어 분석의 죽비를 내린 비트겐슈타인도 예가 되겠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위기를 돌파하는 박근혜만의 승부사적 면모가 두각을 보일 것이다.

 

넓은 개념으로 진보 진영은 그람시의 통찰과 거꾸로 가고 있다. 패배를 이해하는 데 의지를 사용하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데 지성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점에서 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단은 견강부회다. 누가 뭐래도 진 건 진 것이다. 여기에 굳이 어떤 변명을 덧붙이는 데에 지성을 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패배를 조목조목 아프게 받아들이는 데 지성을 써야 새로운 반전의 의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진 것도 이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기억해보라. 작년 10월의 재·보궐선거 후 당시 여당 대표가 말했다.

 

사실관계로 보면 그의 말이 과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서울시장 선거를 빼놓고선 대부분의 선거에서 여권이 승리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당시 한나라당의 안일한 판단과 둔감한 인식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들렸다. 그 때 그들이 보였던 한심한 몽니를 이번에는 진보진영에서 보이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내친 걸음에 그람시의 지적을 하나 더 꺼내놓는다. "자만심을 강화하거나 구체적 사실보다 자만심을 더 좋아하는 자는 분명 진지하게 대할 가치가 없는 자이다."

 

이번 선거결과에서 패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데이터 중 하나가 20~40대의 야당 지지율이다. 방송3사 출구조사에 의하면, 20대는 2010년의 지방선거에서 56.7%, 2011년 10월의 서울시장 재선거에서 69.3%의 야당 지지율을 보였다. 날로 지지강도가 늘어난 셈이다. 그런데 이번의 총선에서는 47.9%로 내려앉았다. 30대는 64.2% → 75.8% → 53.5%의 궤적을 보였다. 40대는 54.2% → 66.8% → 46.1%의 흐름을 나타냈다. 여론조사를 숫자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추세로 읽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20~40대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추세만큼은 틀림없다.

 

또 하나, 투표율이 던지는 메시지다. 이번의 투표율은 54.3%이다. 2년 전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54.5%였다. 1998년 이후의 선거에서 지방선거 투표율에 비해 총선 투표율이 낮았던 경우는 한 번이다. 2008년에 있었던 18대 총선이다. 그 때 투표율이 46.1%였다. 그 이전의 2006년 지방선거 투표율은 51.6%였다. 그 이전 시기, 즉 2002년 지방선거는 48.9%이고 2004년 총선은 60.6%였다. 1998년의 지방선거는 52.7%, 2000년의 총선은 57.2%였다. 과거의 경험에 비춰보면, 이번 총선에서의 투표율은 매우 낮은 것이다. 직전의 지방선거가 54.5%였다면, 이번에는 60%를 넘겼어야 했다. 이런 투표율은 곧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야권이 20~30대의 투표율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울한 대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리서치의 선거 후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은 압도적으로 정당투표에서 새누리당을 지지했다. 새누리당 대 민주통합당의 지지율이 소득 100만 원 이하에선 76.2% 대 12.7%, 101~200만 원에서는 49.7% 대 28.1%, 201~300만 원에서는 48.6% 대 28.9%로 나타났다. 500만 원 이상 고소득층에서는 당연히 45.1% 대 34.8%로 새누리당이 우세했다. 민주통합당이 진보 쪽으로 움직였다고 하고 1%의 부자가 아니라 99%의 서민을 대변한다고 하는데, 정작 그들의 지지를 못 받고 있는 것이다.

 

주택 소유를 기준으로 부자 동네보다 서민 동네가 야권을 더 지지한 것에 비춰 볼 때, 저소득층의 지지를 견인하는 데 실패한 것은 정말 뼈아픈 대목이다. 이것은 민주통합당이 아직 중산층이나 화이트칼라의 지지를 동원하는 데에만 성공할 뿐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는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느 나라든 먹고 살기 힘든 계층이 저절로 깨달아서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보세력이나 정당이 프레임과 정책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바꿔낼 수 있는 대안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계급투표가 가능해진다. 민주통합당이나 야권 연대는 이번 총선에서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4월 7~12일 자에서 지적한 평가는 적절해 보인다. "유권자들이 일자리와 복지를 고민하고 있고, 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온 통합민주당이 불법사찰 문제에 매달린 것은 의외다." 비리와 부정부패 따위의 쟁점으로 유권자를 동원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앞선 선거에서 이런 것에 대한 심판론이 여러 차례 작동했다면 심판의 대상을 경제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이에 대해 민주통합당은 무기력했다.

 

선거 패배의 요인은 간명하다. 민주통합당의 무능이다. 총선 직전인 지난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실시된 선거학회 조사에서 야당으로서의 정권교체를 바라는 응답이 52.5%, 새누리당 재집권이 33.3%였다. 5:3의 구도면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런데도 졌다. 앞서 언급한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총선 결과에 대해 기대했던 결과라는 응답은 42.7%에 불과하고, 기대와 다른 것이라는 응답은 50.9%였다. 이런 결과는 민주통합당의 실력이 모자랐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민주통합당은 지금까지 MB를 악마로 묘사했다.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했다. 이런 세팅은 여권의 주인이 MB일 때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MB 정부 출범 이후 야권이 여러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MB가 주변으로 밀려나고, 다른 사람이 여권의 얼굴로 등장하면 사정이 일변하게 된다. 게다가 그 인물이 여러 사안에서 MB와 맞섰던 사람이면 그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통합당은 박근혜까지 악마 내지 그 동조자로 포지셔닝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명박근혜'라는 말이 이를 말해준다.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박근혜의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51.2%, 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 39.7%로 나타나 이 전략이 나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전략에는 약점이 있다. 박근혜를 주 타깃으로 삼으면 본의 아니게 MB가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 내내 MB는 뒤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민주통합당이 끌어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승리의 화신이 박근혜를 돕는게 아니라 국민전체의 응집력에 의해 박근혜는 살아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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